나는 여행기를 정리하거나 끄적끄적 무언가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동네의 가장 싼 커피집 '파란우산'에 앉아 글을 쓴다. 이 곳은 좌식으로 앉을 수 있는 곳이 나란히 두 곳있는데 그 중 왼쪽 자리를 항상 선호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왼쪽 평상에 앉아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놓고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 2시쯤, 하교한 아이들과 같이 오는 애엄마들이 대부분인 이 곳에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 한명과 청바지를 입은 여자 한명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목소리도 우렁차, 그저 커피를 시키는 것일 뿐인데 시끄러운 술집에서 참이슬 Fresh를 주문하듯 쩌렁쩌렁했다. 잠시 눈이 갔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내 할일을 했다.
그녀들이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은 곳은 내 옆 평상, 그러니까 두개 있는 평상 중 남은 하나의 평상에 앉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해도 어쩔 수 없이 들린다는 위치적 특수성에 대한 설명이다.
목소리도 우렁찬 그녀들은 책꽂이에 꽂혀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책을 하나 꺼내 그리스를 가고 싶다느니, 로마를 가고 싶다느니 하는 평범한 우리나이 또래가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역사책이면 역사책이랄까. 중간에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 이야기까지 갔는지 알 수 는 없지만 그녀들은 어느새 일제강점기 시대까지 역사의 흐름을 타고 올라왔다.
한명의 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잠시 그녀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야, 우리가 유관순한테 배울게 뭔줄 알아?
'뭔데? 독립운동?'
'하.. 아니... 유관순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단 하나야. 나대면 죽는다는 것.'
'...'
세상이 무너지고 내 귀에 악마가 속삭이는 줄 알았다.
아니 잘 못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에 시선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나대니까 죽지. 안 그랬으면 독립도 보고 잘 먹고 잘 살았을텐데. 자기가 안해도 남이 해준다니까.'
세상에... 아무리 배움에 대해 무지하고 세상을 뻔뻔하게 살고 있어도 할 말이 있고 하지 않을 말이 있다. 그런데 이건 도가 지나쳤다. 주변에 있던 초등학생을 둔 애엄마들의 고개가 그 쪽으로 돌아간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나 또한 깜짝놀라서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사태파악을 했는지 담배 한대 피러 밖으로 나가자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 못했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은 듯 했다. 결국 친구가 주제를 다른 쪽으로 바꾸는 것으로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인터넷, 그러니까 익명성을 보장하는 가상의 세계에서나 들어볼만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겪으니 참 할말이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보면 시원하게 한마디 쏴줘야지 라고 항상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겪으니 기가 차서 말도 안나왔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나대면 죽는다라. 그렇게 생각할 수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 노력할 뿐 나 또한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이 그렇게도 슬펐던 이유는 이미 '나대면 죽는다'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퍼진 암묵적 동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동의일지도 모른다'가 아닌 '동의'가 되어버린 걸 수도 있다.
군입대를 할 때 휴가 나온 친구나 만기제대를 한 선배들은 항상 이야기한다.
'가서 나대지마 찍힌다.'
수업시간 끝나는 종이 치기 2분전, 선생님한테 질문을 하는 학생에게도 주변 친구들은 이야기한다.
'아 왜이렇게 나대.'
합법적인 집회를 가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에게도 아니꼬운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저런다고 뭐가 바뀌어? 왜 저렇게 나대?
맞다. 세상은 변했다. 나대면 욕먹는 세상으로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혹은 이 글을 우연히 보게 된 당신이 진실로 유관순 열사가 나대서 죽었다고 믿는다면 나는 화를 낼 마음이 없다. 그저 본인 생각의 한계가 대중과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라 생각할 뿐이다.
인간 이하의 삶으로 고통받은 하시마섬에 끌려간 강제노역자들, 731부대내에서 잔혹한 생체실험을 당한 조선인들, 평생을 피지 못한 꽃 위안부 할머니. 말하자면 끝도 없다. 이들이 나대서 죽은 것일까. 아마 이들은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나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는가.
왜 무한도전에서 하시마섬에 대해 나올 때 울컥하는 눈물이 나오고 대화를 할 때에도 마루타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며, 수요일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아직도 모르겠는가. 유관순 열사가 세상을 등진 이유는 나대서 죽은 것이 아니다. 나대면 죽는 세상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서 언어를 조금 순화해 나댄다는 표현을 세상의 의견을 표출하자라고 바꿔보자.
그녀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 가족, 국가를 위해서 의견을 표출한 것이 죽어야할 이유가 될 것인가?
그럼 지금 내가 이 블로그에 의견을 표출한 것이 내가 죽어야할 이유가 되는가?
우리 모두 계속 나대자. 세상에 계속 의견을 표출해보자. 지금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표출하자. 다양한 생각을 모으자.
나의 확고한 믿음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의견을 표출하고 침묵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세상은 진보한다.
마지막으로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목사 마틴 니뮐러의 시를 적고 글을 마친다.
나치는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나치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나치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나치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나치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