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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기./13~14, 세계일주, 남미

콜롬비아 메데진. #216 엘빠뇰의 호수 앞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by 지구별 여행가 2019. 5. 27.

낮까지 죽은 듯이 자고 싶었지만 오늘 보고타로 떠나는 형의 스케줄에 맞춰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래도 메데진에서 가장 기대되는 엘빠뇰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알록달록한 도시의 매력을 느끼기 좋은 과타페도 유명한 당일치기 코스지만, 우리의 일정에없었다. 나는 형과 달리 며칠 더 메데진에 머물 생각이었으므로 심심하면 혼자 콰타페에 다녀오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약 2시간여를 가면 나오는 거대한 바위산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중간에 작은 마을들에 정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정도로 수수하고 매력적인 마을들이 많았다. 조금 더 넉넉한 일정이라면 하루이틀 머물고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행이 채 한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사치였다.


오토바이를 타라, 뭘 타라 몇몇의 호객행위가 붙었지만 지독하지는 않았다. 대꾸를 하지 않고 천천히 앞만보고 걸으면 대부분 관심을 껐다.

돌산이 굉장히 웅장했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가까이서 보니 까마득하게 이어진 계단을 언제 올라가지 싶었다.

대부분의 아파트 한 층의 계단이 15~20개 정도 되는 것을 생각하면, 총 740개의 계단은 최소 35미터 이상의 높이였다. 계단 740개는 감이 잘 오지 않았지만 35층 높이의 건물로 환산하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앞만 보며 걸어가는데 한국인 중년 아저씨가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일본인 같기도 하고 한국인 같기도 하고 애매한 얼굴이었다. 혼혈인줄 알았던 그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함께 걸어올랐다. 20대의 중반인 나와 30대 후반의 형과 50대 초반의 아저씨의 걸음속도는 당연히 차이가 났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참으로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눈앞 시야에 거스르는게 하나도 없었고 아기자기하며 오밀조밀하게 굽이치는 호수도 아름다웠다. 나중에 이런 맑은 호수를 집 앞에 두고 살면 평온한 마음으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바릴로체 전망대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바빌로체는 중심이 동양의 산세라면 이 곳의 중심은 잔잔한 호수와 외딴 섬처럼 연결되어있는 자그마한 마을들이었다.

내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나였지만 형에게 먼저 다가가 사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계단을 내려와 50대의 형님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며 자신의 숙소에 초대했다.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숙소로 돌아가야했기에 나중에 연락을 드린다고 하고 헤어졌다. 

은 미리 가방을 다 싸들고 나왔기에 굳이 숙소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에콰도르 키토부터 콜롬비아 메데진까지 꽤 긴 시간을 함께 여행한 그를 버스정류장에서 보냈다.


피곤함이 극에 달해 짧은 낮잠을 잔후 엘빠뇰에서 만났던 형님에게 연락하여 주소를 받았다. 메트로를 타야했지만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고 좋은 숙소를 구했는지, 실내 인테리어가 거의 호텔급었고, 부엌이 일반 가정집의 몇 배로 넓었으며, 도미토리 침대사이의 간격은 사람이 두명이 누워도 될정도였다. 가격은? 지금 내가 머물던 숙소보다 3,000원정도 밖에 비싸지 않았다.

바로 주인에게 달려가 내일자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형님은 요리를 잘했다. 냉장고를 여니 갖가지 반찬과 과일이 수북했다. 갖고 있던 고추장으로 고추장찌개를 해주었고, 간단한 달걀 후라이와 소세지 볶음까지 해주었다. 잘 지어진 쌀밥에 양배추 김치를 함께 먹으니 마치 집밥을 먹는 듯 했다. 

나한테 연락이 왔을 때 이것저것 사왔다고 했다. 함께 장을 볼 줄 알고 아무것도 안 사온 내 손이 부끄러웠다.


너무 시간이 늦을 경우 돌아가는 메트로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는 착한 주인장에게 미안했다. 내일 체크인을 한다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이 숙소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늦은 시간까지 있는 것은 큰 실례였다. 

형님에게 내일 아침에 다시 일찍 오겠다 이야기하고 숙소를 떠났다.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만 늦은 시간까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 주인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14.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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