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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기./19, 일본, 히로시마

그들은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 #1 현장의 스산함, 사진과는 다르다.

by 지구별 여행가 2019. 3. 10.

그다지 공항에 여유있게 도착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찍 가봤자 할 것도 없고,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기다리는 것은 더욱 싫었다. 나름 몇번의 공항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대략 50분전에만 도착해도 아주 여유롭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래처 과장님의 부탁으로 향수와 립스틱을 사야만 했다. 어이가 없게도 인천국제공항을 일년에 3~4번 이용했지만, 단 한번도 면세점에서 뭔가를 사본 적이 없었다. 그냥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사면 되는줄 알았다.

'뭐... 한 10분 정도만 일찍 가면 되겠지' 하던 생각은 경솔한 판단이었다.


향수 브랜드 이름도 처음 들어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몇 군데의 면세점을 들렸고, 립스틱을 사기 위해서도 한참 돌아봐야했다. 조금 더 늦게 출발했더라면 정말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았을까 싶었다.

히로시마로 향하는 여행객중 한국인은 많지 않았다. 반은 일본인이었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양의 면세품을 산 중국인들이 반이었다.




짐이라할것도 없이 다니기에 출입국 통관은 가장 먼저 빠져나왔다. 뭐가 의심스러웠는지 보안직원이 내 가방을 전부 열어서 확인을 했던 것만 빼면 다른 공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교통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외국인 여행자를 위한 교통패스는 필히 구입해야하는 것중에 하나인데, 히로시마 교통패스는 걔중에 단연 최고였다. 1,000엔이면 3일동안 무제한으로 버스, 전차를 탈 수 있었고, 미야지마를 가는 페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패스와 시내로 가는 왕복 버스 티켓까지 구매후 공항을 떠났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근처에 게스트하우스를 미리 예약해두었기에 노면 전차를 타고 혼도리에 내렸다. 두정거장 정도를 더 가야 게스트하우스와 가까웠지만 해가 진 후의 평화공원을 보고 싶어 잠시 들렸다 가기로 했다.

특별함은 없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횟불이 켜져있었고 근처에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항상 일본에서는 누구를, 어떠한 목적으로, 특히 '누구를' 추모하는지 모르기에 대부분의 장소에서 예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이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원폭에 희생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의 규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공원을 한바퀴 돌고 숙소로 들어갔다.

조용했다. 예상외였다. 방키를 받아 도미토리안으로 들어가니 적막했다. 사람도 없는데 온풍을 얼마나 강하게 틀었는지 방안의 건조함에 숨이 턱 막혔다. 잠시 온풍을 끄고 문을 열어두었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일본하면 스시가 아니겠는가. 어차피 오늘 저녁엔 갈 곳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으므로 미리 알아둔 스시집으로 향했다.




히로시마를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움직였다. 강가를 걸으며 조금더 조명이 밝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명이 어두우니 음침했고, 자연스럽게 사람이 걷기에 좋지가 아니했다. 한강처럼 큰 강이 아니라 여가 공간을 만들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아름다운 강이 저녁시간에는 인적이 없는 죽은 강으로 보였다.





시스집은 만족스러웠다. 음식은 정갈했으며, 저렴했다. 배가 부를때까지 먹었는데 약 14,000원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4,000엔의 고급 스시는 입에 넣어보지 못했지만.

일본인들의 스시먹는 행태를 구경했다. 나만의 느낌이겠지만, 나처럼 100엔짜리 스시로 배를 채우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고급의 스시 3~4점과 튀김에 생맥주 한잔을 곁들여 먹고는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먹는 방법에 정도는 없다. 나는 스시를 배부르게 먹고 싶었고, 그들은 집에서 간소하게 저녁을 먹고 맥주한잔이 그리워서 나왔는지도.






작은 공원에서 노래를 두곡정도 들으며, 어디가서 맥주를 한잔 할까 하였지만, 이미 배는 불렀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앞에 있는 원폭돔에 잠시 들렀다. 예상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스산함은 더욱 강렬했다. 어두운 날씨, 바로 앞에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그 시간 유독 사람이 없던 점이 만들어낸 현장감있는 스산함이었다.

폴아웃이라는 게임을 열심히, 열성적으로 좋아했는데 그 곳에 나온 건물들과 느낌이 비슷했다. 누군가 돔 뒤에서 저격총을 들고 서있을 듯 하였고, 앞에는 지뢰가 매설되어있지 않을까 싶었으며, 근처의 자판기에서는 누카 콜라를 팔고 있을듯 하였다.





편의점에서 아사히 맥주와 기린 맥주 하나씩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까와 다름없이 사람은 없었다. 여행자로 보이지 않는 흑인 남자 한명이 노트북을 켜놓고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인사라도 할까 하였지만, 그는 바빠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으려고 가져온 '먼북소리' 책을 꺼내왔다. 일본을 대표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여행 수필이었다. 머리 아픈 경제학 서적이나 철학 서적을 들고 간다면 귀찮음에 읽지 않을 것 같아 도서관에서 급하게 빌려온 책이었다. 

그다지 특별함이 느껴지는 책은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피식 웃게 만드는 사소한 재미가 있었다. 

여행을 하고 있지만,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요즘 술을 잘 마시지 않다보니 500ml 맥주 두캔에 취기가 올라왔다. 방으로 올라가니 누군가가 다시 온풍을 틀어놨다. 숨이 턱 막혔지만, 다시 킨 누군가를 위해 굳이 끄지는 않았다. 대신 방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수건에 물을 잔뜩 뭍혀 침대에 걸어두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단돈 13,000원에 빌린 내 침대는 너무 비좁았다. 내일 목이 건조하여 고생을 하거나, 코에 코딱지가 잔뜩 끼지 않을까 걱정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2019.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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