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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상식

의사, 열사, 지사 차이점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by 지구별 여행가 2021. 12. 5.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라고 통틀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교과서나 역사 자료를 보면 독립유공자 성함 뒤에 의사, 열사, 지사라고 적혀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모두 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신 분들이기에 구분지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간단한 뜻은 알아두면 조금 더 역사 자료를 재밌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의사, 열사, 지사 뜻과 차이점

  • 의사

목숨을 걸고 총과 폭탄 등의 무력을 사용하여 직접적인 투쟁을 벌인 분들입니다. 이때 계획한 목표가 이루어졌는지,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열사

비폭력 투쟁을 벌이신 독립운동가입니다. 굳은 지조를 꺽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으며, 스스로 강력한 항의를 위해 생을 마감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 지사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죽음을 무릅쓰고 사상, 철학, 의지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전달하신 분들입니다. 일제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도 지사에 해당됩니다.

 

의사, 열사, 지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 의사

안중근 의사 :

학교 설립을 통해 미래 시대의 인재 양성에 힘쓰셨으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사살, 하얼빈 총영사, 비서관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후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윤봉길 의사 :

19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문맹 퇴치, 민족의식 교육 등에 힘을 쓰셨으나 계몽 운동만으로는 독립의 한계를 느끼시고는 중국으로 가서 백범 김구를 만납니다. 이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수통형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카와바다 단장은 사살,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은 중상을 입혔습니다. 

거사 이후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1932년 5월 28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합니다.

 

  • 열사

유관순 열사 :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 시위를 주도하셨습니다. 일제의 자비 없는 진압으로 19명이 당시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주도자로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공주교도소에 수감됩니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 20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때부터 지속된 심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합니다.

 

이준 열사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됩니다.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장에는 공식적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서신을 보내고 신문에 게재하는 노력을 지속하지만 각국의 대표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격분한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 지사

신채호 지사 :

을사늑약 이후 관직에 나가기를 그만두시고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는 노력을 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의 권업신문에서 글을 쓰시다가 강제 폐간당하고, 상하이에서 신한청년회 조직, 박달학원 창립, 베이징에서는 대한독립청년단, 신대한청년동맹을 창설하여 단장과 부단장을 역임합니다.

1928년 '탈환'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자금 조달을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던 중 일제에 체포됩니다. 이후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시다가 1936년 옥사했습니다.

 

박열 지사 :

1919년 일본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며 비밀 결사회인 흑도회를 조직합니다. 1923년에는 박열 지사의 애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의 도움을 받아 천황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준비합니다. 아쉽게도 실행하기 전 계획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

1926년 3월 가네코와 박열 지사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나, 같은 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두 사람은 감옥에 복역하는 중에 결혼신고를 하여 부부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이후 박열 지사는 8.15 광복으로 22년 2개월 만에 감옥 밖을 나옵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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