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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기./17, 태국

급작스럽게 여행을 가라고 한다면, 방콕. #5 너 남자 좋아해?

by 지구별 여행가 2018. 6. 26.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행지에서의 나는 심각할정도로 게으르다. 보통의 사람들이 하루 3~4곳의 관광지를 구경한다면, 나는 1~2곳만 봐도 많이 봤다 생각했다. 오늘도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에 그다지할 것이 없었다. 일정은 단 하나. 바다를 보는 것뿐이었다.

뒹굴거리다 밖으로 나와 얼마 걷지 않았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디스크 환자이기에 곧은 자세로 오래 서있는 것도 힘든데 가끔씩 잠을 제대로 못자거나 무거운 짐을 오래 메면 요통이 찾아오고는 했다. 잠시 그늘 밑에 앉았다.


빛의 산란없이 내리쬐는 햇살덕에 해변의 온전한 색을 구경했다. 비치 파라솔에 누웠다 갈까하였지만, 발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백사장의 모래를 느끼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었다. 



12시쯤 방콕으로 돌아가기위해 체크아웃을 했다. 청명한 하늘 사진을 몇 장 찍으니 버스터미널이었다. 티켓을 사고 대합실에 앉아있는데 버스회사 직원 아주머니가 내 티켓을 보자하였다. 의심없이 내어주니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라했다. 다음 시간에 출발하는 버스라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어는 '닥치고 버스에 타'라는 느낌이었다. 시간을 번거니 나로써는 전혀 나쁠게 없었다.


약 2시간 후 방콕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택시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러 뿔뿔히 흩어졌다. 버스를 좀 알아보니 카오산로드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기에 그 많은 교통편 중 버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엄청난 교통체증과 함께 어디서도 겪지 못한 매연을 몸소 체험했다. 코를 옷안으로 가려 매연을 피했다. 참을 수 없을정도로 독했다.




숙소는 일본인 게스트하우스로 정했다. 세계일주시에 묵었던 곳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일본인이 많았는데 이날 따라 여행자가 없었다. 단 한명도. 주인장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일본인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더 이상 일본인이 찾아오지 않는다하였다. 

사람이 없으니 선풍기 3대를 내 침대에 연결하고 푹 쉬었다. 


혼자 맥주를 한잔 마시며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작은 바에 앉았다. 할게 없으니 핸드폰을 갖고 노는데 이 곳의 여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약간 귀찮았지만 한두마디 섞다보니 어느새 맥주를 두잔째 먹고 있었다. 한참동안 대화를 하던 그녀가 사라지고 여성성을 보이는 남자가 앉았다. LGBT 어느 경계선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나에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 혹은 그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유의 동남아 발음이 섞여있었지만, 나보다는 영어를 훨씬 잘했다. 같이 맥주를 한두잔 마시다 그가 먼저 자신의 친구네 가게로 맥주를 마시러 가자하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시 또 뜨거운 열기가 넘쳐흐르는 카오산로드의 한복판으로 나갔다.





그의 친구는 여자였는데 간이 판매점에서 칵테일을 팔고 있었다. 느낌상 친구네 술값을 팔아주려 나를 데리고 온듯 했지만, 그다지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하다가 나와 함께온 친구가 배가 고프다며 팟타이를 사러 갔다. 그 사이 여주인이 나에게 바짝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남자 좋아해?"


예상했기에 크게 당황치는 않았다. 우리가 만나게된 경위를 설명했고, 덧붙였다. '나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주변을 보니 카오산로드는 벌써 거대한 클럽으로 치닫고 있었다. 적당히 취기도 있겠다. 댄스본능이 솓구쳤다.

함께 길거리 클럽에 참여하자고 그와 그녀를 꼬셨지만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착한 그들은 나를 위해 가장 핫한 술집으로 안내했다. 술을 마시며 춤을 추니 주변으로 사람들이 생겼고 걔중에 미친듯한 몸부림으로 춤을 추는 남자와 춤을 추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잠시 한쪽에 앉아 쉬는데 칵테일바 주인은 계속 자기네 집에서 술을 사먹으라고 강제로 끌고 가려했다. 분명히 강제였다. 그녀와 헤어짐을 고했다. 숙소에서 만난 남자는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사고 길거리에서 꼬치를 사먹으며 카오산을 방황했다. 재밌어보이는 곳에서는 신나게 춤을 췄고, 여행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말을 섞었다. 약 새벽 2시가 되니 파티는 막바지였다. 여운이 남아 간단히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간이음식집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찰나, 한국인을 만났다.


어디서 만났는지 그들은 태국여자와 한명씩 짝을 이루고 있었다. 내 짝이 없다고 재미가 없는건 아니니 그들과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고 근처 술집을 찾았다. 방콕의 번화가로 갈까했지만, 다시 돌아오기가 애매했고, 태국여자들도 원치 않았다. 근처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고 수다를 떠니 어느새 새벽 4시. 피곤함이 온몸을 덮쳐왔고, 남자 한명은 졸기 시작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한국 남자 둘이 택시를 잡고 앉으니 태국여자 둘이 함께 탔다. 앞에 탄 한국 남자가 호텔 어딘가를 이야기했고, 여자둘은 잠잠했다. 뒤의 일은 누구나 예상이 가능한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의 외국인들이 병 맥주를 들고 끼리끼리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환경미화 아저씨들은 쓰레기 천국인 카오산을 재정비중이었다.

셔트가 굳게 내려간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조심스럽게 주인장을 부르니 문을 열어주었다. 미안했지만 철문 앞에서 몇 시간동안 그들이 깰때까지 기다릴 자신은 없었다. 선풍기 3대를 켰고, 침대에 쓰러졌다.


2017.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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